1.
테라링크에서도 아르주나가 카르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는 점은 역시 아쉽습니다. 오히려 그 그림자가 짙어졌다고 해야 할까요. 카르나 본인이 확인사살을 해 주었지요. [네 눈동자는 집요하게 나를 쫒고 있다. 그렇게 한 사람의 적에게 집착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니 참 곤란한 일이다]라니… 낯뜨거워서 보고 있기 힘들었습니다. 정말 이걸로 괜찮은 건가. 라이터 분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건가.
카르나라는 커다란 벽을 넘고 나면, 영령 아르주나는 현계할 이유가 더이상 없다는 은유일까요. 하지만 아르주나의 본질적인 존재의 불안정성은 이유가 따로 있고, 카르나는 그 숙업을 상징하고 독촉하는 존재에 가깝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역시 아리송하기만 합니다.
2.
카르나 씨가 이런저런 사물, 인물들에게서 특별한 누군가를 떠올리고 항상 감회에 젖는 것과는 달리 아르주나는 카르나와 닮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고 확실히 선을 긋지요. 한평생 그렇게 원망한 상대라면 어딘가 비뚤어지고 일그러진 인격을 투영할 법도 한데, 아르주나가 생각하는 카르나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고결하기만 합니다. 어쩌면 실제보다도 더 미화가 되어 있지 않나 싶을 정도로요. 테라링크에서도 [내가 아는 카르나는 누군가를 돕고 어깨를 빌려주는 일은 있을지언정, 타인의 힘을 등에 업고 자만하는 자가 아니다]라는 둥 아르주나는 손발이 오그라들을 정도로 카르나의 고상한 인품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찬사를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점이 아르주나 본인의 인격을 대변해 주는 것인지도요.
3.
헛소리를 하는(…) 카르나 씨에게 우스꽝스러운 것을 넘어서 화가 치민다고 한 아르주나의 대사는, 아르주나 본인의 체험 퀘스트에서 카르나가 말한 대사의 오마쥬일까요. 카르나 씨야 본인의 특성상 아르주나에 대해 미화도 격하도 시키지 않은 가감없는 평가를 하고 있겠지만요. 그럼에도 무기력하게 헤매고 있던 아르주나에게 각성할 것을 촉구한다던지, 5장에서 악역 쪽에 붙은 그에게 위화감을 느끼는 묘사를 보면 카르나 역시 아르주나에게 요구하는 기대치라는 것은 분명히 있겠지요. 쿤티에게도 그랬습니다만, 페이트 세계관의 카르나 씨는 유독 혈육에게 엄격한 인상입니다. 그런 점도 흥미롭기 그지없는 요소이긴 합니다만.
4.
하기야 [동화]된 카르나는 순수한 카르나 본인이라고 보기에는 위화감이 강했지요. 처음에는 오라클 화(동화)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타락]도 [세뇌]도 아니라고는 하고, 본인의 인격을 유지한다고는 하나 그 카르나 씨가 [진정한 무장은 단 한명뿐이다]라는 대사를 한다는 것은 역시 믿기 힘든 장면이었으니까요. 대제의 [동화]기술은 사실 [매료]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해석도 있었습니다만. 이제 생각해 보면 인류보완계획(…)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모두의 정신/의식/자아가 하나로 이어진, 자아와 타인의 경계가 한없이 애매해진 상태.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호전적이고 자부심 가득한 모습을 내비치던 카르나 씨입니다만, 카를 대제의 자의식이 스며든 상태라면 그 독선에 가까운 자신만만함/성급함/호기로움은 대제의 인격에서 유래한 것일지도요.
하지만 덕분에 감정적이기 그지 없는 카르나 씨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은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내 최후의 싸움이다]라고 아르주나와의 결전에서 외치는 카르나 씨의 목소리는 비장하다 못해 애절하기까지 합니다. 생전에도 그는 이렇게 외쳤던 것일까요.
5.
하쿠노에게 [이렇게까지 마스터와 마음이 잘 맞을 수 있다니]라며 보기 드물 정도의 찬사를 보내면서도, [네가 싫은 것은 아니다]라고 어딘가 기묘하게 쓸쓸한 표현을 하는 카르나 씨. 역시 이 사람은 글러먹은 사람에게야말로 마음 깊이 끌리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의혹이 한층 깊어졌습니다. 무명과는 다른 의미로, 하쿠노와 카르나는 동류이니 만큼 서로 편한 상대이겠지요. 날카로운 통찰안은 물론이고, 본인들은 한없이 정직하고 곧은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반영웅/악역들과 인연이 많다는 점, 영혼이 남자답기 그지없다는 점, 이타적이고 시원스러운 성격을 하고 있지만 강렬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점, 악의 없는 독설이 특기라는 점(…) 등등. 그럼에도 보고 있으면 흐뭇하다던가, 내버려 둘 수가 없다던가 하는 감정적인 표현이 없는 점을 보고 있자면 카르나 씨 본인도 의문을 품어도 좋을 지경일텐데요.
자각한 적은 없어도, 심신의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미숙하고 어리석고 파멸로 치닫아 가는 주군에게 봉사하면서 안절부절 녹초가 되도록 안간힘을 쥐어짜내야 하는 노동환경에서(…) 카르나 씨는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 것이 아닐까요. 이곳이야말로 자신이 있어야 하는 자리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요. 아르주나를 탓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요. 정말 곤란한 사람입니다.
6.
지나코의 이름이 나오지 않은 점은 조금 아쉽습니다만, 희미하게 존재를 언급해 주는 것만으로도 반갑기는 합니다. 거기에 더해 카르나가 지나코와의 약속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는 점은 테라링크에서도 분명하니까요. 한번도 아니고, 재삼 신랄한 비난 혹은 비웃음으로조차 여겨질 정도의 폭로를 들은 질 드레 원수는 한순간 미치기 전의 인격으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진심으로 분노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그런 자신의 언동을 사과하면서도 어떻게든 마지막까지 말을 끝마치려는 카르나 씨의 모습은, 아마도 그 약속을 다하기 위한 노력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부탁받은 빵을 사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보는 사람이 놀랄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낙담하던 그 카르나 씨니까요. 찬사를 표현하려던 것이 결국 상대의 격노를 사고 만 것에 크게 낙심했을 것이 분명한데도, 말을 이어나가는 모습은 기특하기까지 합니다.
질 드레 자신도 카르나 씨의 말을 듣고선 새삼 깨달은 바, 다짐한 바가 있지 않을까요. 호쾌하게 [이 질 드레, 사랑받는 것 따윈 필요 없다]고 외치며 소멸했으니까요. 전혀 기대하고 있지 않았는데, 테라링크에서 캐릭터가 가장 큰 폭으로 더욱 깊어지고 입체적이 된 인물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7.
카르나 씨의 마이룸 대사는 정말로 네타의 향연이군요. 이건 일부러 그런 것이 분명하겠지요(…) 에미야, 지크프리트의 전매특허를 가득 채워넣은 대사에도 한참 웃었습니다만. 카르나 본인의 과거의 언동마저 알뜰살뜰 요리되어 있습니다. 특히나 [알고 있었나……?]라고 반복하는 카르나 씨의 대사는 어딘가 심문당하는 듯한 박력을 느끼게 합니다. 하쿠노라면 무서우니까 그만두라고 하면서도 [알고 있었지만]이라고 태연하게 대답하지 싶지만요. 그랬군요.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한마디 더 덧붙이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아니라, 동요했을 때 무심코 나오는 습관 같은 것이로군요.
무서운 얼굴로 혼잣말을 하거나, 갑자기 쑥스러운 듯 사과를 해 오거나, 만면의 미소를 띄고 칭찬을 해 오거나. 테라링크의 카르나 씨는 정말 표정이 풍부해서 보고 있자니 절로 입가가 올라갑니다.
8.
악역, 중간 보스 역으로 훌륭히 임무를 완수한 카르나 씨입니다만. 아르주나와 둘이서 [처음으로 펼치는 공동전선] 운운하며 등장했을 때에는 왠지 모르게 두 사람 다 때려주고 싶어졌습니다(…) 이렇게 보면 형제는 형제로군요. 훗날 동화로부터 깨어난 아르주나에게 있어서는 지우고 싶은 흑역사가 또 하나 생겼음에 틀림없습니다. 카르나와의 협업은 그렇다 치고, 이제서야 계몽되었다는 듯한 감격을 논하는 어조는 사이비 컬트에 심취한 신자에 다름없었으니까요.
9.
2차 창작 계에서는 자주 보던 소재입니다만(…) 이제 아르주나는 공식적으로 기묘한 카르나 어를 통역해 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인재가 되었군요. 군데군데 논리가 비약되어 있는 카르나 씨의 인사를 듣고, [여기서는 전력을 다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라고 카르나 씨가 하고 싶은 말을 간결하게 한 마디로 핵심을 정리해 주는 아르주나는 정말 우수한 재원이었습니다. 카르나 씨는 정말로 기뻤던 탓에 흥분한 나머지 더욱 수수께끼 같은 문장을 늘어놓고 만 것일지도 모릅니다만, 최근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수준이니까요. 생전의 카르나와 대화하던 아르주나는 절로 주변의 감탄을 자아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꾸준히 노력은 하고 있을지언정, 카르나 씨 본인도 조금 체념하고 있는 구석도 있는 것일까요. 남작에게도 [내 표현으로는 농락으로밖에는 들리지 않는가]라고 혼잣말하는 부분이라던가, 마이룸에서 커뮤니케이션 능력에 대해서는 랭크 E인 만큼 기대하지 말라고 못을 박는 부분이라거나요. 비슷한 정도의 (…) 행운치에 대해서는 서번트 중에서도 톱클래스라고 주장할 정도의 긍정적인 사고의 달인이 이렇게 단언할 정도면 어지간히 자격지심이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연습을 거듭할 것이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지만. 카르나 씨에게도 슬슬, 그 동안의 발전과 노력을 치하해주는 보상이 있으면 좋을 텐데요. 기왕이면 그에게 처음 그 숙제를 내어준 마스터에게서.
10.
인도 형제 둘 다, 설마하니 신의상의 후면 디자인이 등이 깊이 파인 홀터넥일 줄은 몰랐습니다. 둘 다 이 시리즈의 색기담당 포지션으로 자리매김한 것일까요(…) 카르나 씨의 검은 의상이 사실은 의상이 아니라 변색된 피부라는 설정도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새로운 디자인, 특히 발레리노를 연상케 하는 하의 부분은 사실 길가메쉬보다도 더한 노출도일지도 모릅니다. 왜, 이제와서 벗긴 것인지 의문입니다만. 이 여름에 시원하기도 할 것이고, 건강에도 좋을 것이고, 카르나 씨로서도 신선한 시도일지도요(…) 그런데도 어째서 수영복의 스탠딩 일러스트는 없는 것인지 아쉬운 일입니다. 금번 카르나 씨의 수영복 모델이 나온다면, 기상천외한 수영복도 알로하 셔츠도 좋지만 YARIO의 오버롤을 입은 농부 카르나 씨도 좋을 것 같군요. 아포크리파 에필로그 이벤트 때처럼 혼자서 붕 뜬 복장을 한 카르나 씨. 다들 화사하게 차려입고 셀레브리티들 답게 리조트에서의 휴일을 즐기고 있는데 혼자서 흙먼지 투성이인 옷을 입고 저 멀리 그늘에서 묵묵히 수박과 복숭아, 체리, 블루베리 등등 여름 과일을 수확해 가지런히 바구니에 담아주는 카르나 씨. 이마저도 손님들의 감사 인사와 찬사를 들을 수 있는 서빙 역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 적어도 쿠훌린만큼은 카르나 씨와 비슷한 처지려나요. 그라면 웨이터 역도 적격이겠군요.
11.
이제 카르나 씨가 활약하는 다음 이야기가 발매되는 것은 언제가 될까요. 점점 개그 지분이 늘어나고 있는 카르나 씨입니다만(…) 카르나 씨가 즐거워하는 이야기라면 오히려 마음 편히 기다릴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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